문화류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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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

한동안 지속되었던 류씨와 차씨의 문제(이하 류차문제)는 2008년에 문화류씨 대동보(전체 족보)인 "문화류씨세보"가 발간되어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대내외에 천명(闡明: 드러내서 밝힘)함으로써 결론이 났다.


문화류씨대종회에서 문화류씨 전체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동보에까지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더 이상 대승공의 성명에 대해 왈가왈부하여 문화류씨의 시조를 모독하는 일이나 류씨와 차씨의 조상이 같다고 하는 잘못된 말은 없어져야 한다. 아래의 "4. 원파록삭제변(辨)"에 이런 결론에까지 이른 내력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는 문화류씨세보에 나와 있는 관련 내용을 종합-정리하여 소개한다. 류차문제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주 :
- 편의상 관련 부분만 발췌하였음.
- 한자로만 나와 있는 부분은 한글을 먼저 쓰고 한자를 괄호 안에 넣었음.
- 말이 어려운 부분은 필자가 괄호 안에 해설하거나 쉬운 말로 바꾸었음. 괄호 안의 내용은 한자와 년도를 제외하
  고는 모두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기서 추가된 것임.



1. 문화류씨세보서(序)


"그리고 차씨(車氏)들의 소요(騷擾: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킴)에 대한 변명(辨明)은 처음에는 곧은 것으로 원망(怨望: 분하게 여겨 탓하거나 미워함)에 보답하는데 시작되어 나중에는 바른 것으로 사특(邪慝: 잘못되고 악한 것)한 것을 물리침으로서 마치었으니 이른 우리 류씨(柳氏)의 공통된 의견이었던 바, 회계(會稽)의 수치(羞恥), 곧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했던 회계산(會稽山)에서의 수모(受侮: 모욕을 받음)를 구천(句踐)이 가히 잊겠는가?"


해설:
족보의 서문이다. 여기서는 류차문제가 불거졌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원망하였고 사실을 가지고 차씨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원망을 갚으려고 했는데, 점점 근본적인 문제점과 차씨들의 간계(간사한 꾀)를 알게 되어 마침내 류씨와 차씨의 관계를 해소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복수를 이룩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달게 겪는 것)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구천과 부차는 잘 알려져 있다.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 왕 부차에게 항복을 하고 온갖 치욕을 겪었는데 이것을 "회계지욕(會稽之辱)"이라 한다. 구천은 갖은 고생을 다하며 복수를 계획해서 마침내 성공한다. 그렇게 류씨들이 차씨들이 일으킨 사건을 잊지 않고 대응을 했음을 말하고 있다.


2. 문화류씨세보발(跋)


"근래 들어 차문(車門)에서 우리 류씨(柳氏)에 대해서 감히 가성(假性: 임시로 쓰는 성, 가짜 성)이라 이르고 우리 가정보(嘉靖譜)에 대해서 또한 감히 조작(造作)이라 운운하며 그 망령(妄靈)됨이 다함이 없었다. 이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의논하기를, 남의 능욕(凌辱: 모욕; 업신여겨 욕보임)을 막으려면 증거를 세움보다 앞설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내외 문헌(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것을 모아 연구하고 더욱 연구하기를 무려 수년만에 저들의 주장이 모두 날조(捏造)와 허위(虛僞)의 지경으로 돌아가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십년 만인 정해(丁亥; 2007년)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회동하는 약속을 파기하였다. 아아! 운무(雲霧: 구름과 안개)가 태양(太陽)을 가리운들 어찌 가히 오래 가겠는가?"


해설:
발(跋 = 발문跋文)은 책의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또는 그에 관계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다.


차씨문중(차문)에서는 그동안 '류씨'가 가짜 성, 또는 임시 성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가정보"에서는 대승공의 맏아들이라고 주장되는 차효전이 나오지 않으니 조작되었다고 비난해왔다.


그런데 "가정보"는 가정임술년(1562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문화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가정(嘉靖)은 중국 연호의 하나이다. 가정보 앞에는 영락보(永樂譜)가 있었는데 1423년 만들어진 이 족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의 체제를 갖춘 본격적인 족보인데 아쉽게도 남한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고 북한에는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가정보는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하여 문화류씨들보다 다른 성씨들이 훨씬 많이 올라있는 족보이며 그 내용이 엄밀하여 학계에서도 귀중한 자료로서 이용되고 있다. 이런 가치 있는 족보에서 대승공의 맏아들이 있었다면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대승공의 아들은 가정보에 나온 대로 류효금이라는 분 하나뿐인 것이다.


그 후 문화류씨들은 열심히 문헌을 찾아보며 대체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탐구했다. 그 결과 류차문제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 가짜 책)임을 밝혀냈고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아냈다. 그래서 류문에서는 2007년에는 그동안 차씨와 류씨들의 공동 대종회 성격의 단체였던 "차류대종회"를 파기함으로써 차문과의 관계가 없음을 천명했다.


3. 문화류씨세보범례(凡例)


"- 차문(車門)에서 근래의 성씨(姓氏)와 족보(族譜)로써 분란(紛亂)을 일으킨 일이 있는데 우리 성씨(姓氏)를 폄훼(貶毁: 남을 깎아내리고 헐뜯음)하여 가성(假姓)이라 이르고 우리 족보(族譜)를 비방(誹謗)하여 위보(僞譜: 거짓된 족보)라 이른 것이다. 우리 종회(宗會)에서는 그 진위(眞僞)를 분별(分別)하고 그 시비(是非)를 규명(糾明)하고자 더욱 널리 더욱 깊이 탐구(探究)하였는데 "가성위보"(假姓僞譜) 4자(四字)의 명목(名目)이 돌아갈 곳은 마땅히 저들의 차문(車門)이요 우리 류문(柳門)이 아닌 바, 어찌 그 분란(紛亂)에 대치(對峙: 서로 맞서서 버팀)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당시 여러 말과 관계되는 문헌(文獻)을 모두 지나간 일은 말하지 않고 이미 지난 일은 꾸짖지 않는 데로 돌려보내는 바, 이는 나에게 대들어도 굳이 상대(相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기사보(己巳譜)에 실린 원파록(源派錄)만은 후일 고고학자(考古學者)를 위해서 특히 영인(影印: 사진을 찍어 인쇄함)으로 남겨 전하는 바, 보는 이는 양지(諒知: 살피어 앎)하기 바란다."


해설:
족보에서 범례(일러두기)는 의외로 중요하다. 족보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만들고 구성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범례 항목에서는 류문이 차문에서 일으킨 문제들을 연구해왔고 충분히 세세하게 대응할 수 있지만 족보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다. 다만 기사보(1689년의 문화류씨 족보)에는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원파록이 처음 실렸는데 "망매(茫昧: 흐리터분하고 밝지 못함)하지만 실어서 훗날 연구하게 한다"고 범례에 특별히 지적해 놓았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이 경고는 잊고 그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2008년 족보에 와서야 비로소 그 기사보의 지적을 받아들여 원파록을 깊이 연구하고 그 결과 허황됨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족보에서는 그 원파록을 모두 없애는 것보다는 일부 남겨놓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했고 그래서 그 범례와 원파록 첫 페이지만을 기사보 그대로 촬영해서 싣고 있다.


4. 원파록삭제변(辨)



"금번 우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함에 있어 편수위원회(編修委員會)의 결의(決議)와 대종회(大宗會)의 인준(認准)에 의하여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오직 그 최초에 실린 기사보(己巳譜)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영인(影印)하여 예전 그 자리에 보존(保存)하는 바, 이들 삭제(削除)함은 그 기록(記錄)이 경위(經緯)에 맞지 않은 때문이요, 보존(保存)하는 것은 그 기록(記錄)을 근거로 삼기 위함이다.


이는 조선(朝鮮) 말엽부터 세보(世譜) 문헌편(文獻篇)에 실려 있었는데 기록(記錄)이 허구(虛構)함이 넘치고 말이 번거로움이 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천년간(數千年間) 모든 사적(事蹟)을 보기가 어제 일을 보는 것 같고 듣기가 오늘 아침의 사적을 듣는 것 같은 바, 가령(假令) 기혈(氣血)을 받고 태어난 후손들이라도 오히려 그를 위본(僞本)으로 의심이 많겠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주: 기사보부터 실리기 시작한 원파록(源派錄)에는 중국 황제(黃帝)에서 시작해서 후에 왕씨, 차씨, 류씨로 이어지는 수천년간의 모든 계보가 상세히 들어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가짜임을 의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음.)


이(원파록을 의미)를 깊이 연구(硏究)하게 된 발단(發端)은 지난 정축(丁丑, 1997)에 연안차씨(延安車氏)들이 대전(大田) 안영공원(安永公園; 뿌리공원을 말함)의 한 모퉁이에 그들의 유래비(由來碑)를 세운 바, 비석(碑石) 안에 원파록(源派錄)에 의거하여 우리 류씨(柳氏)를 폄훼(貶毁)한 글이 있는데 우리 류씨(柳氏)를 가성(假姓; 가짜 성)이라 이르고,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차해(車海)라 고치고, 2세(二世) 좌윤공(佐尹公) 효금(孝金)을 문화류씨시조(文化柳氏始祖)라 하고, 이 밖에 류씨(柳氏)를 헐뜯는 등 여러 말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폄훼(貶毁)한 것과 같았다.
(*주: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숙손무숙(叔孫武叔)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孔子)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했음.)


또 갑신(甲申; 2004)에 그들이 족보(族譜; 연안차씨대동보)를 간행(刊行)하면서 그 유래비문(由來碑文)을 중 일 영 독 불어(中 日 英 獨 佛語) 등 5개국어(五個國語)로 번역(飜譯) 해석(解釋)하여 그 책 머리에 올려, 가까이는 성내(城內)에 반포(頒布)하고 멀리는 해외(海外)에 전파(傳播)하여 온 세상의 이목(耳目)을 바꾸고자 한 바, 그 심지(心地)의 사악(邪惡)함과 모사(謀事)의 졸렬(拙劣)함은 그 분수를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가소(可笑)로울 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우리 영락(永樂) 가정(嘉靖) 양서(兩書; 족보 영락보와 가정보를 의미함)를 또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듯 여지(餘地) 없이 배척(排斥)한 바, 해동(海東) 족보(族譜)의 효시(嚆矢; 영락보는 최초의 본격적 족보라는 학계의 공통적 인정을 받고 있음)라 일컫는 것과 비교해 볼진대 어찌 그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른가? 눈으로 가히 볼 수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바, 그 공교(工巧)로운 말이 앵무새보다 지나치고 사악(邪惡)한 뜻이 도깨비에 가까워 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보다 더 간사(奸邪)하였다.


이에 동년(同年) 8월(八月)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 긴급히 대책회의(對策會議)를 열어 저들의 방자(放恣) 흉악(凶惡)함이 날로 심하여 형세상(形勢上) 그냥 둘 수 없다 하고, 난상토론(爛商討論)한 끝에 여러 의론(議論)이 하나로 모아져 이르기를 "차문(車門)의 주장이 정녕 사실(史實)이라면 마땅히 승복(承服)하는 것이 옳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대응(對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하건대 사람의 자손(子孫)된 자로서 남이 자기 할아버지를 무망(誣妄)하는 것을 보고도 변명(辨明)할 줄 모른다면 아들을 두고 손자를 둔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남의 능욕(凌辱)을 중지(中止)시키는 데는 증거(證據)를 세우는 것이 최선(最善)인 바, 공 사가문헌(公 史家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由來)와 관련이 있는 것을 널리 수집(蒐集), 심층(深層) 탐구(探究)하고 정밀(精密) 분석(分析)하여 글 한편을 만들어 종보(宗報)에 등재(登載)하였으니 실로 이는 한편으로는 종인(宗人)들에게 두루 알리는 자료를 삼고, 한편으로는 차문(車門)의 소요(騷擾)에 대한 조목조목 분별의 증거를 삼기 위함이라, 그러나 결코 감정(感情)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논리(論理)를 세워 기술(記述)한 것과 증빙문헌(證憑文獻)을 동봉(同封)하여 시정(是正)을 촉구(促求)하였다.


그 후 수차 회의에서 종합(綜合) 토론(討論)한 바, 소위 차모설원기(車某雪寃記; 차원부설원기를 지칭함)와 강보원파록(江譜源派錄; 원파록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강남보라는 계보를 의미; 이것은 연안차씨 족보에도 가짜라는 주장이 실렸었음)은 전혀 역사적(歷史的) 증거(證據)가 없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 선세(先世)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들어 그 말을 맹신(盲信)하고 후인(後人)들 또한 선인(先人)의 유서(遺緖: 남긴 내력)라서 맹종(盲從)함으로 이에 이르러 저들이 그 시기(時期)를 틈타서 또 날조(捏造)하고 또 왜곡(歪曲)하여 일(一)을 십(十)으로 더하고 십(十)을 백(百)으로 불린 것이다. 곰곰 생각건대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바꾸기 수천년(數千年) 동안, 부인(婦人)도 없이 독신(獨身)으로 백대(百代)를 전한다는 것(원파록의 내용이 이러함. 곧 수천년 동안 희씨-사씨-왕씨-차씨-류씨로 성씨가 바뀌면서 이어지고 류씨에서 차씨가 갈려나갔다는 내용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어찌 있을 법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지금에 이르도록 세간(世間)에서 아는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동조이성(同祖異姓: 조상이 같은 다른 성씨)이라는 말은 실로 근거없는 거짓이요 잘못된 전설(傳說)이다.


이제 모욕(侮辱)을 막고자 함에 있어 실로 이 기록을 삭제(削除)하는 것보다 우선(于先)할 것이 없고, 또한 성인(聖人)도 일지기 의자궐지지훈(疑者闕之訓)이 있다, 곧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교훈(敎訓)이 있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모욕(侮辱)을 막는 때에 이르러 어찌 성인(聖人)이 이른 바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겠는가?


더욱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바, 근래 들으니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에 이수건(李樹健) 교수(敎授)가 있어 사학(史學)으로 일세(一世)의 추중(推重: 추앙하여 중히 여김)을 받은 분으로 그 논문(論文)에 이른 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朝鮮時代 身分史 資料造作)이란 글이 출현(出現)하였는데 그 가운데 "차모(車某)의 설원기(雪寃記)는 그(차원부를 의미) 후손 이제([턱 이]齊: 차식(車軾)의 호(號)임) 3부자(三父子), 곧 이제 식(軾)과 그 아들 오산(五山) 천로(天輅)와 창주(滄洲) 운로(雲輅)의 공저(共著)라." 이른 말이 있다. 이로써 볼진대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삭제(削除)하지 않음은 사리(事理) 판단에 밝았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자공(子貢)의 변명(辨明)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결정될 것인 바, 우리 대승공(大丞公)의 후손 된 자는 스스로 반성(反省)하는 자리에 있어(있기 때문에) 류(柳)씨와 차(車)씨가 근원이 한가지라는 말은 점점 후인(後人)의 입에서 없어질 것이니 성인(聖人)의 의심되는 것은 빼라는 경계(警戒)의 의의(意義)를 어찌 가볍게 이르겠는가?


저들이나 우리를 논할 것 없이 사실(史實)을 왜곡(歪曲)할진대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고 후손(後孫)을 속인다는 기롱(譏弄: 실없는 말로 농락함)과 세상을 미혹(迷惑)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죄(罪)를 면치 못할 것이니, 더욱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십년(十年)만인 정해년(丁亥年; 2007)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한 자리에서 친목(親睦)을 다지던 모임(차류대종회를 의미함)이 깨지고 각기 본래의 처지(處地)로 돌아간 바, 기분이 상쾌함이 장마에 개인 날을 얻은 것 같고, 마음이 통쾌함이 가뭄에 비를 얻은 것 같다. 이 상쾌하고 유쾌함이 마땅이 길이 전할 일로서 오직 원하는 바, 여러 종친(宗親)들은 함께 그 뜻을 힘쓰고 함께 그 힘을 다하여 오늘날 이 글을 삭제(削除)하는 의의(意義)를 계속 지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조선시대 신분사(史) 관련 자료조작




해설:
이 논문은 성씨 관련 연구로 저명한 이수건이라는 분이 저자인데, 이 분은 영남대 명예교수였다. 이 교수가 "조선시대 역사속의 사건조작과 기록조작"의 방대한 주제로 연구논문을 계획했다가 2006년에 작고했기에, 이수환이라는 분이 일부 정리해서 연구 논문으로 낸 것이다. 문화류씨세보(2008년)에서는 이 논문 전체를 싣고 있는데, 여기서는 논문의 일부(첫 페이지와 주요한 내용이 나온 다른 두 페이지)만 사진으로 보였다.
 
- 저자 :
- 출처 :
- 내용 :
이수건(李樹健), 이수환(李樹奐)
"대구사학" 86집(2007년 2월)
조선시대 신분의 역사에서 자료 조작이 만연했음을 지적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서 "차원부설원기"를 들고 있음. 이 논문에서는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이라고 단언하며 그 위작자, 위작시기, 위작동기, 위작내용 등을 단정적으로 추정하고 있음.


6. 맺음말

실제 우리 사회는 온갖 조작들이 득세를 하는 폐단이 많았고 그 유산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런 것이 지금은 생기지 않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화류씨 문중에서는 거짓을 깨달은 순간 과감하게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수정하는,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그 일을 실천해서 세상에 보여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동안 잘못되어 왔던 허다한 일들이 시정되고 역사 왜곡과 같은 소아병적 행태들은 지양되어 진실만이 힘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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