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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회 > 차문에 대한 류문의 입장, 2011. 3. 31.

 
車門에 대한 柳門의 立場

 
    『世有許多文獻而不檢證於其眞僞虛實則寧不如無者也』
    「세상에 많은 문헌이 있으나 그 진위와 허실이 검증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이는 옛 성현께서 탄식하신 말씀을 의역한 것인데, 후세 학자들도 공감하는 견해이고 우리 역시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부터 수년간, 류 차 양문 간에 선계 문제로 상호 시시비비 많은 필전(筆戰)을 가졌던 바, 차문에서는 우리 류문에서 제기한『차원부설원기』에 의한 원파록 조작에 대한 해명은 모두 얼버무리고, 동선이성(同先異姓)이라는 해괴한 논조로 근세 양문 간에 뻔히 아는 상황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한편 예전대로 환원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류문과 차문과의 관계에 대해서 한두 가지 쉬운 예를 들어 이르겠습니다. 첫째, 부부간에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성격상, 혹 경제적, 혹 어떤 이유로 이혼한 부부 간에 후에 자식을 위해서든 또는 여하한 사정으로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고, 둘째, 어려서 고아원에서 만나 서로 형제로 알고 지낸 고아 사이에 후에 친부가 나타나 동기간이 아님을 확인하고 헤어질 경우도 있습니다. 상식으로 전자의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계속 형제의 의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근세에 들어 왜곡된「원파록」의 사실을 모르고, 의심 없이 지내던 오늘날 류ㆍ차 양문의 입장이 후자의 경우와 똑 같습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터에 2011년 3월19일 입수한 2010년판 『車門宗報』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실린 몇 가지 사항을 간추려 쪽수 차례로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55쪽,『차원부설원기가 나오기 전 고려 초기 서희의 야사와 정지상의 서경잡기와 김방경의 초당일기 등에 선계에 대한 단편적인 것만 전해 내려왔다.』운운에 대하여, 현재까지 국가공인 고전 서지목록에 서희와 김방경의 저서는 없고, 다만 정지상의 저서로『정사간집』이 있을 뿐인 바, 앞서 이른 서적이 분명 존재한다면 그 복사본이라도 제시하기를 요구한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63쪽,『대승공 류차달의 행적이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는다.』운운에 대하여, 고려사 열전, 공의 6세손 문간공 류공권 편에「공의 6세조 대승 차달은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고 등재되어 있고, 그 밖에 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문화현의 인물편에「류차달은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융통 공급함으로써 그 공훈으로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의 훈호를 받았다.」라고 소연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헌을 보았는지요? 못 보았는지요?
    64쪽, 류문의 모 임원이 쓴『車譜序疑』(「차씨 족보 서문에 대한 의문」)이란 글을 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약재상공 류상운(約齋相公 柳尙運)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주장이다.』라고 힐책한 데 대하여, 우리 대종회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및 약재상공의 묘갈명과 연보 등을 두루 살펴 사실을 쓰고, 또 그 유고 「약재집(約齋集)」에 차씨의 귀중한 족보서문이 실려 있지 않음을 들어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 짐작건대 차문에서 그 훌륭한 명망을 흠앙하여 약재상공이 서거한 직후에 날조하였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약재집에 빠질 이유가 없는 바, 납득할만한 해명을 못하는 차문에서 그 모독 불경을 오히려 사과할 것을 정중히 권합니다.
    65쪽,『양문이 불화를 계속하게 되면 부산 기장 차능과 광주 광산 대동사 세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차류대종회에서 1970년대 들어 차능을 봉축하여 향사를 주관하고, 2000년대 들어 대동사 사우 중수를 계기로 그 숭모회 및 보존회를 결성하여 향사에 적극 협조하였으나, 2007년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후로는 양쪽 모두 그 지역에서 근근이 향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옛말에〈可祀者祀之非其鬼而祭之諂〉〈가히 제사를 지낼 분에 제사를 받드는 것이지, 제사 지낼 신령이 아닌데도 제사를 받드는 것은 아첨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차ㆍ류 양문의 관계가 종결되어 차류대종회가 해체된 이상 우리 대종회에서는 앞으로 시조 대승공의 향사를 주관하여 받들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68쪽,『1390년 운암 차원부가 차류보판을 해주 신광사에 보관한 후에 월파옹을 포함한 차문 70여인이 송원 마원에서 추살 당하고 차류보판도 소실 당하였다.』운운한 데 대하여, 그 말대로 차류 양문의 족보를 함께 발간했다면 류씨들은 전혀 모르게 차원부 혼자 간행했다는 말입니까?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 차문 70여인이 추살 당했다 하는데, 차씨 족보에 당시 생존자를 모두 헤아려 보아도 70여인이 되지 않는데 70여인 추살 운운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면 정사는 물론 어느 야사에라도 나타날 것인데 전혀 없으니 이 또한 차원부설원기의 날조의 극치라 여겨집니다.
    75쪽, 호랑이 설화를 무려 30쪽에 달하도록 장황하게 쓰고 도표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에 대하여 전국 여러 성씨를 통틀어 이야기를 모으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일고의 가치가 없는 횡설수설에 불과합니다.
    85쪽,『문화류씨 조상인 중대광 대승 문도공 차달』운운한 데 대하여, 중대광은 1품, 대승은 3품으로서 고려 때 지방 토호 등에게 준 향직의 품계입니다. 한 사람의 직계가 1품이면 1품, 3품이면 3품이지 1품, 3품을 병기할 수 있습니까? 문도공이란 어휘의 시호는 금시초문이고, 우리 시조 류차달은 다만 대승일 뿐 시호를 받지도 않았고 전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차문에서 임금을 사칭, 대승공의 관직을 높여 시호를 내린 격으로서 외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후손으로서 선대의 관직을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높이거나 올리는 것은 법도를 모르는 천박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1쪽,『몇몇 사가들이 설원기를 위작이라는 주장이 약간 있다.』운운한 데 대하여, 설원기를 위작이라 주장한 분들은 모두 당대에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학에 조예가 깊은 대표적인 실학자들로서 곧 영조 때 담와 홍계희(淡窩 洪啓禧), 몽예 남극관(夢囈 南克寬),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 성호 이 익(星湖李 瀷), 지호 이 선(芝湖 李 選) 등 석학들이었고, 현세의 학자로는 이수건(李樹健), 김난옥 및 우리 종중의 류주환(柳朱桓)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예전 석학들은 물론 현세 학자들 또한 차씨와 무슨 철천지원수이기에 괜히 남의 선대의 기록을 위작이니 날조니 공개적으로 비판하겠습니까? 그 분들을 힐책하기에 앞서 공사, 진위, 시비를 가려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려는 학자들의 우수한 정신과 정직한 기개를 우리 모두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종회에서는「차원부설원기」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설원기의 허구성, 그에 의한 원파록의 날조 등, 하나에서 백까지 수긍하려고 해도 수긍할 수 없는 조작의 실태가 환히 드러나는데 귀문에서는 이러니 저러니 추측 운운하며 얼버무리고 있는 바, 참으로 삼척동자 아니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112쪽, 정조 10년(1786) 9월7일,「일성록」에 의하면, 차원부의 시호를 청하는 상언에 대하여『수백 년 동안 거행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운운하였습니다. 그런데 2004년도에 간행한 연안차씨대동보 문헌편을 펴 보니, 세조 2년(1456) 5월 차원부에게 문절공의 시호가 내린 냥 교지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세조 때 이미 시호를 받고서 330년이 지난 후 정조 때 시호를 또 청하다니? 자가당착도 유분수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문화류씨 대종회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역대 족보 및 많은 공ㆍ사가 문헌을 수집, 수년에 걸쳐 정밀탐구하고 앞서 거론한 학자들의 유고 및 연구논문들을 참고하여 대종회의 결의로《원파록삭제변》을 부쳐 드디어 2008년 5월 대동보(23권 1질)를 간행, 세상에 배포하였습니다. 우리 문화류씨는 예전과 다름없이 역사적으로 확연한 대승공 류차달을 시조로 받들어 명문의 전통을 지켜나갈 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옛날에 문장과 박식이 많았지만 공가문헌을 접하기가 실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학문은 예전만 못하지만 모든 문헌이 전부 공개되어 누구나 구하여 보기가 쉬워짐으로써 거짓이 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논어에『過則勿憚改』곧 허물이 있거든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을 다스림에 용맹치 못하면 악한 마음이 날로 자라나기 때문에 허물이 있으면 속히 고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차문에 거듭 이르는 바, 사실이 뻔히 왜곡된 것을 알면서도 선대의 일이라 고집하며 괜한 억설을 일삼아 세월을 보내는 것은〈조상을 욕되게 하고 후손을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 하루빨리 용단을 내려 세간의 냉소를 면하고 후손들의 의혹을 해소하여 떳떳한 종중의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 현세대의 지혜로운 정도의 선택이라 고언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서기 2011년 3월 31일,     文化柳氏大宗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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